회사 생활을 하면 싫어도 해야 하는 자리들이 종종 있다.
업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여 잘 견뎌 내지만 업무 이외의 것들은 참아 내기가 힘들다.
그 중에서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누누히 강조하는 회식 자리가 그러하다.
사회 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자 상사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행해지는 회식 자리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 회식 문화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뭐 요즘도 크게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아졌다.
상사를 모시고 하는 회식이란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함일 뿐, 일의 연장선이란 말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상사들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기에 싫어도 감수해야 하는 엿 같은 세상이었다.
내가 회사를 때려 치우지 않는 이상 회식자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나마 식당에서는 괜찮다. 배고픔을 빙자해 밥만 먹어대면 될 일이고, 술 잔을 채워 주는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2차로 가는 노래방이나 노래연습장 같은 곳에서는 사정이 그러하지 못하다.
걸핏하면 분위기를 띄우라고 노래를 시키고, 춤추는 걸 강요 당하고, 그들이 노래 부르면 손뼉을 치고, 탬버린을 흔들어야 했다.
춤이라는 것도 내가 흥이 나야 되는데, 삐에로가 따로 없다.
이런 자리가 어찌 즐거울 수 있으리.
누군가 발라드를 부르면 죽어버릴 기세로 째려 본다. 발라드에 꼭 브루스를 추자고 나대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발라드를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누군가와 브루스를 출 바에 차라리 춤을 추는 게 낫다.
신사적이고 어른스러움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정갈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온갖 진상을 다 받아 주어야 한다.
회식이라는 걸 누가 만들어 놓았을까, 분명 좋은 의도였을텐데 ᆢ
공과 사를 구분하여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서로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인지,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이런 자리에서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권력을 가지고 노는 것은 회사 내에서만 하고, 이런 자리에서는 그저 어른이면 안되는 거냐고 외치고 싶었다.
왜 접대 받으려는 X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한심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회식할 바에 그냥 야간 근무하는 게 훨씬 속이 편하다.
여자들이 수다스럽다 했는가?
술이 들어가면 남자들의 말이 끊어지는 않는 실타래처럼 계속 뿜어져 나왔다.
누에고치인가? 아님 말 못해 죽은 몽달귀신이 붙었나, 계속 듣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다.
화장실을 핑계로 그 말의 허리를 끊어 놓지만 다녀오면 또 앉혀 놓고 다리를 연결하듯 붙인다. 눈은 반 쯤 풀려서 초점 마저 없는데.
열심히 술이라도 먹여 그 입을 막고 싶지만 자꾸 내 술잔에 '짠짠'하며 같이 마시기를 권유하는 통에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혼자 먹지, 왜 자꾸 건배를 남발하는지.
회사 내에서 감내하던 것과는 다르게 회식자리에서 뱉아 놓는 언어들은 좀 더 끈적거리고 지저분하다.
상사들의 형편없는 야한 농담에 반응하기가 역겨워진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라고 말할 때는 아예 입을 뭉개버리고 싶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러니 발악할 수 밖에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팔아서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회식 때만 되면 꾀병이란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술만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고 연기를 했다.
꾀병! 그 곳을 빠져 나오기 위한 나의 슬픈 몸짓이었다.
거지 같은 회식 문화가 없는 병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꾀병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난 3차까지 지옥의 문을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만 먹으면 머리가 아프다는 꾀병을 지어댔고, 점점 기정사실화되어 회식자리 때마다 빠져 나오는 무기가 되어 주었다.
꾀병으로 두 가지 효과를 봤다. 술을 더는 권하지 않거나 일찍 보내준다. 물론 좋은 표정들은 아니다.
거짓말이지만, 꾀병이지만,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없게 만드는 자리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회식 문화가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건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몇 명의 고발에도, 광화문 거리 여성들의 외침에도,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바꾸어 놓기에는 미비한 감이 없지 않다.
술을 권하지 않는 자유로운 문화, 서로가 즐길 수 있는 회식자리라면 나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꾀병 부리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