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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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대학시절
한 방에서 자취를 했던 친구가 있었다.
강원도에 계신 부모님이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고,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다녔다.
나도 이 친구를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먹은 라면국물을 그 다음날 먹은 기억도 있다.
난 사실 아침은 잘 먹지 않았다.
계명대학교 자연관 식당에는 4,000원짜리 국밥과 함께 밤식빵도 4,000원에 팔았다.
아침에 수업을 들어가면서 식빵을 종종 사가지고 들어간다.
교수님이 판서를 하시면 빵을 구겨 넣었다.
같이 수업을 받는 친구들이 한 움큼 뜯어서 던지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우리 둘은 술은 먹지 못했다.
돈도 없었지만, 술을 먹으면 간과 심장이 감당을 못하는 알콜해독력이 없는 체질이다.
우리가 자취를 했던 동네는 파산동이라 불렸다.
지금은 파호동이라 불린다.
1988년 그곳은 공동묘지였고, 동네가 학교와 공동묘지를 건너가면 있었다.
초라한 집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비싼 땅이 되어버렸다.
계명대학교가 동산병원을 파호동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이렇게 변한 파산동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대장암이 척추에 전이되어 철갑옷을 두르지 않으면 척추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투병하면서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시를 쓰다 떠났다.
같은 방에서 자취를 할 때
지난 밤 먹고 설겆이 하지 않고 남겨둔 라면국물에 밥을 말아먹지 못하게 했더라면......
그러면 대장암은 걸리지 않았을까?
대학 2학년까지만 같이 자취를 했는데,
좀 더 챙겨주었더라면 달라졌을까?
나도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이었고, 매일 정신 없이 바빴다.
영어영문학의 밤 기획을 맡아서 시청각실에서 며칠을 밤을 새기도 했다.
과대표를 맡아서 방방곡곡 놀러다닐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좀 더 친구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리지는 않았을까?
병상에 누워서도 항상 웃어주던 친구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때에도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해 주던 친구
문병을 가서 내가 위로를 받고 와야했던 친구
이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기를~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졌기를~
백만불짜리 미소만큼은 그곳에서도 함께 있는 이들에게 퍼주기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 썼던 시들이 그곳에서 네 된장냄새나는 구수한 목소리로 낭독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