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1월 어느 날 밤, 제주도로 떠났다. 목적이랄 건 딱히 없었다. 계획도 느슨했고. 그냥 걸으러 가는 거였다. 장편 소설 집필 시작하기 전에 기분 전환도 할 겸(이제는 그 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가족들과 전화하고 길을 나섰다. 숙소까지 2km남짓 걸으면 되었는데 주위가 어둡고 졸리기도 해서 (잘 시간은 아니었다) 교차로에서 지도 어플을 한참 쳐다봤다. 제주도 도민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어디로 가세요?" 묻고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 확인하는 데까지 다시 10분이 걸렸다.
어려운 길이 전혀 아닌데도 길을 잃을 수 있다니, 황당하면서도 그게 너무 범상한 일이라 오금이 저렸다. 인생에서 얼마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뻔히 아는 길에서 길을 잃는 일.
빗발이 멎은 제주도 공기는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했고, 나는 바다 냄새가 나는 바람을 맡으며 숙소에 도착했다. 룸키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나는 내가 길을 잃었던 오거리를 계속 생각했다. 알지만 모르는 것들에 관하여.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내게 와 길을 알려 준 그 분에게 새삼스러운 감사를 느낀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숙소까지 가는 길이 더 멀었을 수도 있겠다. 그 감사를 가지고 나는 내게 익숙한 공간에서 헤맬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어디로 가세요?" 하고 물어야지. 그게 보답일 거라고 생각하면 세상이 자꾸만 개선되는 공간으로 보인다. 희망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