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남이 나를 넘겨 짚어 생긴 에피소드를 적어볼까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뇌리 속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짧은 시간 근무했던 곳이다. 회사 분위기는 참 좋았다. 그 중심에 이 주임이라는 관리자가 있었다. 우리 부서가 가족같은 분위기가 될 수 있었던 건 이주임 때문이었다. 참 선한 사람이었고, 화를 잘 내지 않고 직원들을 따뜻하게 안았다.
그래서인지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었고, . 그때 당시 신생기업이라 모두 하나 되어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였다. 퇴근 후에도 술 한잔을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장의 손편지를 받게 된다. 손편지를 보낸 사람은 회사 내 다른 부서의 여직원이었다. 가깝거나 친하지는 않았지만 회사 내에서 자주 보는 사이였다.
여자끼리 손편지를 주고 받는 게 그리 어색한 시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을 읽고 당황스러웠다.
이 여직원이 나와 이 주임사이를 핑크빛 기류로 넘겨짚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시집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또, 시집이나 책을 읽을 때 맘에 드는 문구나 문장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 형이다.
테이블에 있던 시집을 이 주임이 나한테서 빌려 갔고, 그 빌려간 시집을 이 주임이 읽다 책상에 올려놓은 걸 여직원이 어쩌다 읽게 된 모양이다.
뭐 그게 문제될 건 없다. 어차피 책이란 돌고 도는 것처럼 돌려 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여직원이 아주 예쁘게 돌려서 말했지만 분명 나와 이 주임의 사이를 동료 이상의 관계로 넘겨 짚었다는 사실이다.
편지 내용에는 <이 주임은 약혼자가 있다. 그것도 회사내 경리과에 다니는 사람이다. 언니가 빌려준 시집을 봤는데 밑줄 그어진 내용이 꼭 둘이 사귀는 것 같아 걱정된다. 곧 결혼할 사람인데 언니만 상처받을 수 있으니 마음을 정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이런 뉘앙스의 편지를 내게 보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회사동료일뿐인데.
이 주임에게 약혼자가 있건 없건, 내가 알았건 몰랐건, 사내연애를 숨기기 위해 비밀로 했건 말았건 그건 이 주임의 사생활이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왜 결혼할 여자가 있는 남자와 뭘 한 것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불쾌했고, 어떤 연유로 이 주임하고 날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한 것인지, 또 내가 오해를 부를만한 행동을 한 건지 따져 물어야만 했다.
그녀는 시집을 빌려준 것도 그렇고, 시집에 밑줄 그어놓은 글귀가 사랑의 메시지 쯤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경리과 언니랑 친해서 두 사람을 걱정해서 이런 편지를 보냈다해도 나는 솔직히 불쾌했다.
빌려준 시집과 내가 그어놓은 밑줄만으로 오해하고 내게 편지를 썼다구?
그녀는 내게 "언니 미안해요 오해해서. 아니면 됐어요"라고 사과를 했지만 굉장히 찝찝했다. 그녀가 흘린 말 때문이었다.
"언니는 아니라도 이 주임님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왠지 의심의 뿌리를 완전히 거두는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넘겨짚은 건 그 애인데 내가 왜 해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오해 받은 상황이 억울함에도 확인시켜주거나 해명할 뭐가 있어야 말을 할텐데.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주임에게 묻는 것도 너무 웃기는 상황이라 달리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동료로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고 난 후 그 모든 것이 불편했다. 왠지 퇴근 후 다같이 가는 술자리에서도 예전처럼 즐기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어려서인지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단지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 마음만 컸던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흔히들 일어나는 오해의 소지들을 유연하게 대처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속상할 때가 간혹 있다. 그때가 그랬다.
지금은 세월에 의해 바람에 의해 나도 많이 유연해지기는 했다. 그냥 무시할 건 무시하기도 하고, 오해를 하든 착각을 하든 나만 아니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자존심만 내세웠는지 안타까웠다.
나도 어렸고, 그 여직원도 어렸다. 성숙하지 못한 내가 거기 있었고, 또 그녀가 있었다. 그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내가 아쉬울 뿐이다. 지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