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되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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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첫째와 눈사람을 만드셨던 어머니.
7남매를 낳으셨는데, 막내인 나를 제일 걱정하시던 어머니.
손자만 태어났는데,
막내인 내가 손녀를 낳자, 처음으로 병원까지 달려와서 손녀를 구경하겠다고 하셨던,
"날마다 새벽에 기도할 때, 네 이름을 빼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하시던 목소리가 쟁쟁하다.
팔공산 드라이브코스를 마지막으로 돌았던 날이다.
80세가 넘어도 차를 타고 여행하기를 좋아하셨다.
포항으로 가서 바닷가를 드라이브 하시면서, "속이 뻥 뚫린다" 하셨는데,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속 시원하게 사시기를!
우리가 모시기 전에는 홀로 청도 산골,
내가 살던 고향집을 지키고 계셨다.
평생 자동차를 가져보시지도,
운전면허증을 따 보신 적도 없으시다.
허리가 자꾸만 숙여져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셔야했다.
유모차는 "벤츠"를 끌고 다니셨다^^
채전밭을 일구고,
마당에는 각종 화분들에 꽃을 피우셨다.
장독대에는 간장, 된장과 고추장이 풍성했다.
청도 반시감나무, 무화과나무, 대추나무가 어머니의 친구였다.
자식들에게 상추, 고추, 호박, 무, 배추를 주고 싶어
기다시피 하시면서 채전밭을 일구셨는데,
혼자 계시는 것이 너무 힘들고 위험해 보여서 우리가 모시기로 했다.
막내로 엄마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기에,
마지막 8개월은 우리집에서 황후께서 모시고 살았다.
황후가 너무 잘 모신 탓인지,
다리의 힘이 빠지시고,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게 되셨다.
홀로 계실 때는 죽기 살기로 기어서라도 움직이셔야 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 모시니 편안해지셔서 다리도 허리도 급속히 약해지셨다.
이제는 하늘나라로 가셔서 84년의 노구는
돌을 빼내고 터를 닦았던 뒷산 밭 한 가운데 먼저 아버지가 누우신 곁에 뉘이셨다.
이제는 나도 어머니를 따라 가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을은 그날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한다.
너무나 행복하게, 너무나 즐겁게 살았다.
앞으로 남은 날이 며칠 되지 않아도 더 행복하게, 더 즐겁게 살아야지.
가을 가족의 품이 그립고,
단풍 떨어진 아스팔트 길이 추억을 소환한다.
엄마랑 바닷길을 속이 뻥 뚫리게 다시 달려보고 싶다.